이도저도 아닌 삼천포

어설픈 천체물리학

모비 딕 2020. 6. 28. 20:55

 대한민국 고삼의 삶은 양계장 닭의 그것과 비슷하다. 불이 켜져 있으면 일과시간이라 생각하고 알을 낳는……아니, 공부한다. 간간이 밥을 주면 넙죽 받아먹는다. 닭이 사는 곳은 양계장이라고 부르고, 고삼이 사는 곳은 삼면이라 부른다. 양계장의 A4용지만 한 우리보다는 크지만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인 삼면의 칸막이 책상에 질린 나는 그곳을 영영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진정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자유보다 타이핑할 자유를 더 갈망하던 나는 11시가 넘어서 삼면을 아주 잠깐 나왔다.

 

 그렇게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아니라 삼면을 나온 고삼은 앞쪽 면학실에서 열심히 울프람 알파에 숫자를 쳐넣고 있었다. (처넣은 거 아니다. 쳐서 넣은 거다.) 그런데 저 멀리서 목 늘어난 흰 티셔츠와 펑퍼짐한 교복바지를 입은 기린이 겅중겅중 뛰어오기 시작했다. 기린의 손에는 노트북과 함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의 계산 종이가 들려 있었다. 설마 저걸 들고 화장실에 가려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때, 그 기린이 내 앞에 멈춰서서 속삭이기 시작했다. “선배, 저번에 질문했던 그 플럭스랑 인텐시티 공식 있잖아요. 그거 직접 유도했어요.” , 화장실에 온 게 아니라 날 찾아온 거였군. 근데 뭐라고? 플럭스랑 인텐시티? , 그 천체물리에서 별의 밝기 구하는 공식? 근데 그걸 직접 유도했다고? 구면좌표계에서 적분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주섬주섬) 이거 편하게 보시고 내일 수업시간에 주세요.” 그렇게 기린은 종이 한 장을 내게 하사하고, 우아하게 11층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나는 그 종이에 적힌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고상한 글에는 감히 담을 수 없는 수식과, 그리스인이 아니라면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오메가 람다 카파가 난무했다. 기린이 해낸 것을 닭이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종이를 붙잡고 씨름하다 보니 2자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과 함께, 머릿속에서 유레카가 울려퍼졌다. 유레카 유레카 유레ㅋ 유렠……. , 그래서 L=4πR^2σT_eff^4 이로군! 다시 종이를 훑으면서 나는 기린의 수려한 유도 과정에 감동받았다

기린이 들고 온 공식은 선생님도 어떻게 유도하는지 설명하지 못하신 것이었다. 사실 선생님이 설명 못 하시는 것은 많다. 아주 많다. 선생님께 천체물리 질문을 하다 보면, 꼭 델포이 신탁을 듣는 것 같다. (유해한 과학 용어는 무해한 단어로 대체했다.)

 

: 선생님이시여, 어찌하여 풀묵꽃을 구하기 위해 고양이 꼬리를 0부터 무한대까지 연주하면 분모에 파이가 생기나이까.

선생님: 그것은…… 잠깐만 기다리도록 하여라. (이론서 뒤적뒤적) 그것은 (…중략…) 이렇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느냐. , 이게 아니지. 유니콘이 아니라 유니콘 곱하기 무지개구나. 어 이상하다. 왜 풀묵꽃이 이렇게 정의되지? , 옛날에 책에서 콩나물상의 왜곡 때문에 그렇게 정의한다 했던 것 같다. 어 아닌가. (혼자 생각) 혹시 다른 질문 있어?

: (전조등에 잡힌 고라니 표정) …… 이 문제도 아직 이해가 안 됐는데요……. (이론서를 어깨 너머로 본다) , 근데 여기서는 풀묵꽃이 다르게 정의되어 있네요……?

선생님: 어 그렇네. 그럼 아까 생각한 게 틀린 건가? .[1]

 

 그렇다. 천체물리는 선생님께 배우는 수업이 아니다. 선생님과 함께 배우는 수업이다. 아이고, 답답워라. 말을 허여 말을 하오. 선생님도 모르는 걸 도대체 내가 어떻게, 왜 배운단 말가.

 

 그런데 선생님이 대답을 못 하신다는 뜻은, 그 문제는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출제자도 모르는 문제가 시험에 나올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 3일 전에도, 우리는 누구도 답을 말해주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늘어졌다. 왜냐고? 재미있으니까. 신기하니까. 이거야말로 답을 알 수 없는 난제다. 도대체 왜 이 수업이 재미있을까. 역시 이번에도 델포이 신탁, 아니 다산관 신탁은 답을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다른 답이 나왔다.

 

: 아아,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그렇지? 우리가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어서 그래. 원래 partition function이라는 건 열역학을 다 다루고 넘어와야 이해되는 개념이거든. 가끔은 내가 너무 욕심부린 건가 싶기도 해. (상처받은 눈망울)

: (황급히) 아니에요. 그래도 재미있어요.

선생님: 사실 이 수업을 연 게 바로 그걸 위해서였어. 나는 학교 다닐 때 도대체 왜 적분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하는지, 왜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되는지 몰랐거든. 그래서 안 했어. 그러다가 완전 큰코 다쳤지. 그래서 기본 수학이랑 물리가 나중에 이렇게 쓰이는구나, 그때 가서 재미있는 걸 하려면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 이걸 느끼게 해 주려고 이 수업을 연 거야. 지금 배우는 걸 다 이해 못 하더라도, 그걸 느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더라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재미를 느끼게 해 주는 수업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결국 학문은 얻어먹는 게 아니라 퍼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서 직접 퍼먹기 위해서는, 일단 어설퍼도 퍼먹는 맛을 알아야 한다. 그게 제대로 얻어먹는 경험만큼 중요하다. 항상 아폴론 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말만 하시던 선생님의 아리송한 신탁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의 공강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유레카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유레카 유레카 유레ㅋ 유렠…….

 

 사실, 도대체 선생님이 답을 알고 계시는지 궁금한 수업은 천체물리학 말고도 꽤 있다. (아마 민사고 학생이라면 몇 개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까마득할 때마다, 선생님의 신탁을 기억해보면 좋을 듯하다. 2% 부족한 지식을 얻어먹을지라도 200% 흘러넘치는 열정을 수혈받을 수 있기에, 오늘도 약간은 어설픈 천체물리학의 매력에 빠진다.

 


[1] 원본 대화는 다음과 같다.

: 선생님이시여, 어찌하여 플럭스를 구하기 위해 플랑크 함수를 0부터 무한대까지 적분하면 분모에 파이가 생기나이까.

선생님: 그것은…… 잠깐만 기다리도록 하여라. (이론서 뒤적뒤적) 그것은 (…중략…) 이렇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느냐. , 이게 아니지. 단위면적이 아니라 단위면적 곱하기 단위각이구나. 어 이상하다. 왜 플럭스가 이렇게 정의되지? , 옛날에 책에서 곡면상의 왜곡 때문에 그렇게 정의한다 했던 것 같다. 어 아닌가. (혼자 생각) 혹시 다른 질문 있어?

: (전조등에 잡힌 고라니 표정) …… 이 문제도 아직 이해가 안 됐는데요……. (이론서를 어깨 너머로 본다) , 근데 여기서는 다르게 정의되어 있네요……? 여기서 구한 건 표면 플럭스인데요.

선생님: 어 그렇네. 그럼 아까 생각한 게 틀린 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