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저도 아닌 삼천포

당당한 이과가 되자

모비 딕 2020. 8. 8. 00:13

 지금의 내가 가진 과학적 유머 감각을 키운(따라서 나를 론리 깔깔맨으로 만든) 이는 8할이 프리즐 선생님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는 <신기한 스쿨버스>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나와 동생에게 틀어주셨다. 어디선가 불법으로 복사한 듯한 CD 하나하나에는 각 에피소드의 제목이 아빠 손글씨로 써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지금도 길을 가다가 경적 소리가 들리면, 불타는 듯이 빨간 곱슬머리를 질끈 묶고 태양계 행성들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누군가가 “Seat belt, everyone!”이라고 외칠 것만 같다. 그리고는 <신기한 스쿨버스> 시리즈 주제가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그렇다. 세뇌란 무서운 것이다.

 

 화면 속으로만 만나던 프리즐 선생님을 실제 세계에서 만난 것은 내가 열 살이 되고 나서였다. 새로운 교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 올해 담임선생님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분이시군하는 생각을 전혀 못 했다. 할 수가 없었다. S 선생님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무늬 양복을 입지 않으셨고, 도마뱀을 어깨 위에 데리고 다니지도 않으셨으며,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노란색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범상치 않은 기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발현되기 시작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을 위한 과학 교과서는 <과학><실험관찰>, 두 권으로 되어 있었다. <실험관찰>이라는 책은 겉보기에는 <과학>에 나오는 실험들을 직접 해 보고, 이를 기록하는 실험노트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이 교과서 회사의 모범답안을 적는 받아쓰기 노트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험관찰>에 나오는 실험들을 실제로 해 보지는 않지만, 빈칸은 다 채워야 한다. 이것은 “1984”의 언론 조작에 버금가는 우리들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하지만 S 선생님은 그런 규칙 따위는 신경쓰지 않으시는 듯했다. 선생님은 <실험관찰>배추흰나비의 일생을 관찰하세요.’라는 명령을 내리면, 노란 배추흰나비 알을 선생님이 직접 만든 나비 하우스에 진짜로 담아오셨다. 애벌레는 알에서 나와 무럭무럭 잘 크다가 번데기가 되었다. 그리고는 나비가 되어 번데기를 탈출했지만…… 날지 못했다. 몸이 굳어버린 나비를 어떻게든 날게 해 주려고, 긴 대걸레를 천장까지 들어올려서 나비를 톡톡 건드리시던 선생님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떨렸다. “어어, 나비야? ……. 아이구, 왜 몸을 움직이지를 못하니.” 그렇게 나비 스토리는 슬프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실험관찰>의 나비 관찰 일지 맨 마지막 칸은 텅 빈 채로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배웠다. 실험이란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 실패는 엄청난 슬픔을 동반하기도 한다.)

 

 나비의 새드엔딩에 기죽지 않으신 선생님은 흥미로운 동물들을 하나 둘씩 영입하셨다. 그렇게 올챙이와 달팽이가 교실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스테고사우루스와 메머드도 데려오셨겠지만, 이는 시간과 지면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쉬는 시간에 종종 교실 뒤에서 달팽이를 지켜보곤 했다. 달팽이는 아이들이 와서 시끄럽게 하면 숨어버렸지만, 가끔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잠자코 있으면 고개를 내밀고 상추를 먹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모래요정이 기분 좋은 날 고요한 아침이면 기꺼이 소원을 들어주듯이.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은 동물에 한정되지 않았다. 광합성을 하는 존재도 선생님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화분을 하나씩 가져오라고 하셨다. 물론 평범한 담임선생님들도 학생들에게 화분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S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당신도 화분을 하나 장만하셨다. 그 화분에서 잠자던 아이의 이름은 여주였다. 여주가 뭐냐고? 내가 아무리 여기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키우면서 그 거대한 덩굴을 보지 못한다면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작은 씨앗이 얼마나 길게 자라서 교실 창문을 휘감을 수 있는지를. (당시 공개수업에 왔던 엄마는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밀림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선생님의 여주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혼기가 찼다. 그러나 꿀벌 같은 중매쟁이를 구할 수 없었던 선생님은 직접 꽃을 수정시키기로 결심하셨다. 내게서 붓을 빌려가신 선생님은 그길로 의자를 딛고, 창문 틀 위로 올라서서, 팔을 최대한 길게 뻗고 여주의 암술과 수술을 붓으로 문질러 꽃가루를 옮겼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여주는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배웠다. 실험은 가끔 성공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뭐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다.)

 

 S 선생님 덕분에 열 살 때부터 과학을 사랑하며 과학자의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때는 그게 과학인지도 몰랐다. 바로 그 인식의 실패가 핵심이다. 선생님은 과학 공부와 <실험관찰> 빈칸 채우기에 의무감을 부여하는, 과학이 삶의 방식이고 즐거운 라이프스타일일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하셨다. 이는 민사고에서 과학을 배우다 보면 가장 먼저 잊어버리(도록 강제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작년 어느 날 아침, H와 함께 등교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왜 국내이과로 계열을 옮겼어?” H가 물었다.

, 그때는 이과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

그러자 H가 대답했다. “전에는 과학이 좋았지? 근데 하다 보니까 조금씩 싫어진 거야.”

그 순간, 내가 느끼기만 하고 표현하지 못하던 감정이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아아, 사랑이 식었구나. 잠과 배고픔을 참으면서 앱바 퀴즈 공부를 하면 애정이 싹 달아나기 마련이다. 어지러울 때까지 정보를 쑤셔넣다 보면, 나중에는 과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토할 것 같다. 하지만 애초에 왜 과학을 시작했는가. 퀴즈 잘 보려고? 아니다. 시험 쳐서 등급 매기려고? 웃기는 소리다. 우리는 과학이 재미있으니까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어서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쩌면 민사고에 오고 나서 내가 과연 이과 자격이 있나하는 게슈탈트 붕괴를 겪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선택에 확신이 없고, 그래서 더 불안한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과인 이유는 한때 우리가 과학을 향한 불타오르는 열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과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과학 좀 못 하는 것 같으면 어때. 즐기면 되지. 즐기다 보면 잘 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한때는 과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정이 뚝 떨어져서 쳐다보기도 싫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과학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느낀 경험 그 자체니까.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나중에 어떤 분야든 깊이 파고들 수 있다. 우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세상을 바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어깨를 피고, 허리를 피고, 당당하게 걷자.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