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 땜질에 좋은 활동/독서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

모비 딕 2020. 10. 11. 01:43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는 매달 도서 신청을 받는다.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하라는 공지를 보고 나서 인터넷 쇼핑을 하듯 영혼 없이 사이언스북스 홈페이지 스크롤을 내리던 중,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도서관에 신청하고 몇 달 뒤에 책을 받아 첫 장을 넘겼는데, 뭔가 익숙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지 않나요?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과학사 도서가 꽂혀 있는 400번대 초반 서가로 가서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중국을 사랑한 남자”(사이먼 윈체스터 저,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이 책도 스크롤을 내리다가 발굴해서, 도서관을 사주해 구한 책이었다. 어디서 그 이름을 봤는지 그제서야 알았다. 중국 과학사를 연구한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의 평전 중국을 사랑한 남자의 감수를 맡은 사람이 바로 전상운이었다. 그 책을 펼치면 차례가 나오기도 전에 그가 니덤과의 일화를 써 놓은 새빨간 페이지가 등장한다. 니덤이 자신에게 선물받은 코리안 진생 레드 티를 기쁘게 마시던, 니덤 과학사 연구소에서의 티타임을 추억하는 글이다. 그 짧은 글에서 깊고 진한 홍삼차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래서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는 처음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전상운은 니덤처럼 평생을 과학사 연구에 바친 과학사학자이다. 제목이 반영하듯 그가 몸담은 과학사는 우리과학사, 즉 한국 과학사였다.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는 그렇게 한평생 바쳐 연구한 한국 과학사를 너무 깊지 않게 개괄하고, 그와 함께 연구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사건들을 엮어놓은 책이다. 그가 각 잡고 쓴 과학사 도서였던한국 과학사보다는 과학사 자체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듯하지만(“한국 과학사는 아직 안 읽었다. 근데 이 책 읽다 보니까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도 그의 학문적 철학이 충분히 배어나왔다. 전상운의 신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한국 과학의 우수성을 학문적으로 증명한다이다. 단순히 우리 과학이 우수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청동기 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다 일본 학자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그러나 전상운은 민족적 우수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진실을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분개한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청동 기술이 나름대로 형성되고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의 청동 기술이 한국의 기술에 의해서 형성되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대 과학 기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인 청동 기술 문제에 일찍부터 큰 관심을 가졌던 나에게, 일본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늘 마음에 걸리는 숙제의 하나였다. 무언가 괘씸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것이 민족 감정이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학문적으로 결코 그대로 지나쳐 갈 수가 없었다.청동 기술은 고대의 핵심이고 그 시기 최첨단 기술이란 점에서 기술사의 흐름에서 최대의 쟁점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07)

 

, 가야의 토기 등잔을 보면서도 아무도 등잔이라고 당당히 선언하지 못하는 학계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우리는 로마 시대의 유적에서 수많은 로마 등잔들을 보아 왔다. 그것을 볼 때, 그건 로마 문명의 높은 수준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 질 좋은 토기를 그렇게 많이 만들면서 등잔은 만들지 않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이상하다. (342)

 

, 전상운은 단순히 한국 과학이 뛰어나니까 우수성을 인정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식민사관과 사대주의에 갇혀, 한국 과학의 진면모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눈앞에 뛰어난 청동기 문명의 유물이 있고, 요업 기술의 결정체인 토기가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부정하면서 한국 과학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잘못된 태도라고, 전상운은 일관되게 주장한다. 이렇게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과학사의 진실을 찾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그의 연구는 결코 단순한 국뽕으로 격하될 수 없다. 부록으로 수록된 인터뷰에서 전상운은 이렇게 말한다.

 

그 전까지 나온 금속 활자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논의들을 보니까, 이런 기술적인 측면에 대한 구체적인 고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세계 최초다, 탁월한 성과다, 우리 민족 창조성의 발현이다 하는 이야기만 있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죠. 뭐 이런 논의들도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고무시키는 이야기니까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죠. 그러나 우수하다는데 그게 왜 우수한 거냐 하는 것을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설명하는 게 아니니까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는 어렵죠.이런 부분을 내가 채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정말로 우수한지 보자. 있는 그대로. (656)

 

제가 정말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남긴 과학적 성과를 그냥 나열만 하고, 구체적인 설명 없이 무조건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에 통용되지 않는다, 왜 훌륭하고 탁월한 건지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해서, 청동기 시대, 삼국 시대, 조선 시대까지 어떤 성과들을 남겼고, 그것이 왜 뛰어난지를 설명하고 싶었어요. (744쪽. 지금까지의 인용문에 있는 강조 표시는 모두 내가 첨가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와 설명을 제시하는 것. 지극히 학자다운 신념이고 추구해 마땅한 목표다.

 

 책 마지막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인터뷰에는 그가 과학사라는 외딴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온갖 역경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버드-옌칭 연구소에 가야 하는데 연구비 지원을 못 받아서 집을 팔고(!) 1,000달러를 받아 미국으로 날아간 일, 그렇게 얻은 돈으로는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매일 점심을 도넛 2개와 콜라 한 병으로 때운 일, 그러다 어느 날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로부터 몇백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고 그날은 기념으로 서브마린 샌드위치를 먹은 일, 꼭 봐야 하는 유물이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창고에 갇혀 있어서 큐레이터에게 사정사정한 일, 그 큐레이터가 창고 불이 켜져 있어서 끄고 오겠다고 상사에게 거짓말을 하고 문을 열어준 일, 그렇게 들어간 창고에서 유물 사진을 찍으려는데 카메라가 고장나서 사진을 못 찍은 일, 그래서 하나하나 유물을 손으로 그리고 실측한 일……. 그렇게 힘들게 글을 쓰고, 발로 뛰면서도 새로운 유물을 발견하는 순간에는 모든 노고가 사라졌다는 그의 고백을 읽다 보면 부럽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는 공부에 미친 사람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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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만약물론 그럴 가능성은 천문학적으로(?) 낮지만사이언스북스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증보판 출간을 고려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좋은 책에 비문(주로 조사 선택 실수로 보입니다), 단순 오탈자 등의 사소한 오류가 너무 많은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ㅠㅠ 이 귀한 책의 옥에 티를 부디 없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