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열전

과학철학으로 유니콘과 도킹하다

모비 딕 2021. 3. 31. 05:19

언제부터 유니콘들이 인간 행세를 하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인 척하는 유니콘들이 우리 사회에 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유니콘들이 처음부터 그들의 정체를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 유니콘들은 그들의 뿔이 왜 존재하는지를 인간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인간들은 그 뿔을 ‘열정’이라고 불렀다). 유니콘들은 억울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도 머리에 왜 그렇게 길고 단단하고 고집 센 구조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뿔은 그저 거기 있었고, 그 뿔 때문에 유니콘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직접적인 보상(그 보상의 이름은 ‘돈’인 듯했다)이 주어지지 않는 일에 삶을 바쳐야 할 이유를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이를 알게 된 유니콘들은, 결국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를 포기한다. 결코 뽑을 수 없는 뿔을 숨기고, 인간 행세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유니콘은 항상 고독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본다. 그저 방 안에서 자신만큼 고독해 보이는 얼굴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D 선생님을 알아본 방법이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유니콘 특유의 쓸쓸함을 담고 있었다. 과학철학 수업이 열리던 첫날, D 선생님은 교실에 억지로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원하시면 이 수업 안 들으셔도 됩니다. 여기 와서 주무시든 다른 과제를 하든 전혀 상관 없어요. 그냥 공강이다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뭐, 수업이 재미있다 싶으면 들으셔도 됩니다. 어쨌든 저는 매주 수업을 할 거니까요. 하지만 인생에 하나도 도움 안 되고 재미도 드럽게 없을 거예요.” 대중이 관심을 보이든 말든 자신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말은, 모든 유니콘의 행동선언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대중적이지 않음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사고방식은 유니콘의 DNA에 새겨진 본능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인생에 하나도 도움 안 되고 재미도 드럽게 없는’ 그 과학철학이 바로 내 뿔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선생님이 마지막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그 수업을 듣는 데 나의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수업은 보통 1:1 과외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쿤의 관점을 설명하기 전에, 과학이 어떤 학문인지 다시 짚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자, 여기서 이과인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면 아무도 안 들 테니까, 혹시 이과입니까?” 나는 나를 가리키는 선생님에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단 한 명을 위한 수업일지라도 선생님은 매 시간 칠판을 한가득 채우고, 지우고, 새로운 내용으로 다시 채웠다. 내가 그 많은 내용을 받아적느라 허덕이면 종종 짖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왜 적습니까? 이런 거 알면 머리만 아파요.” 그렇게 반 학기짜리 짧은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확신했다. 드디어 숨어 있던 유니콘을 찾았음을.

어렵게 찾은 유니콘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 쌀쌀한 겨울날, 나는 D 선생님의 오피스에 찾아갔다. 뉴턴의 과학철학에 대한 수업을 열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학기에는 바쁘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선생님에게,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보였다. “이 수업을 열 능력이 있는 분은 선생님밖에 없어요.” 그리고 3.14Hz의 텔레파시를 보냈다. (파이는 예로부터 유니콘 전용 주파수였다.) ‘같은 유니콘끼리 도와야죠.’ 선생님은 결국 굴복했다.

D 선생님은 예의 그 ‘접근금지’ 경고로 수업을 시작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재미도 없을 테니, 웬만하면 수업을 듣지 말라는. 하지만 난 그 경고에 교묘하게 감춘 유니콘 언어를 감지했다. 그건 이 경고를 무시하고 감히 철학에 발을 담글 이를 찾고 있다는 외침이었다. 내가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리라. 그렇게 나는 뉴턴의 비정한 세계로 속절없이 빨려들어갔다.

뉴턴은 분명 유니콘이었을 것이다. 질량이 물체의 내재적 성질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중력이 신비로운 성질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뉴턴에게는 이 모든 문제가 아주 중요했다. (아마도 그에게만 중요했을) 심오한 주제들을 다룬 그의 글은, 독자의 시신경을 태우고 시냅스를 마비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만유인력에 대한 길고 긴 논증을 읽으면서 나와 D 선생님은 점점 지쳐갔다. 그러나 그의 논증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어떤 순간에도 경험하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우리도 분명 유니콘이었기에.

학기가 끝나는 날, 나는 다시 한 번 D 선생님을 찾았다. 이번에는 수업을 열어달라고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업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은 교실 창문 안으로 고개를 내민 나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건너왔다. 창문 앞에 선 선생님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인간 위장용 선글라스 따위는 던져버린, 유니콘 본연의 강렬한 눈이었다. “진짜로 과학사 전공하고 싶습니까?” “당연하죠. 선생님 수업 들으면서 확신이 생겼어요.” “그래요. 내가 전공한 분야는 과학철학이랑 맞닿아 있으니까, 본인은 그 분야로 쭉 가고 나도 계속 공부하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겁니다. 그때는 본인이 날 가르칠 거예요. 제가 <프린키피아> 라틴어 원전 들고 가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한 수 가르쳐 주십쇼’ 하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내가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그동안 선생님이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D 선생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철학 공부할 시간에 국영수 공부나 해라’였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유니콘임을 인정했다. 뭐, 그렇게 태어났는데 어쩌겠는가. 머리에 솟은 뿔이 가리키는 외길을 걸어가는 수밖에. 그 길이 쓸쓸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D 선생님이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 길 위에서 다시 만나자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외길을 걸어야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사실 그 길은 외길이 아니다. 그 길을 걷다가 D 선생님을 만났고, 그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선생님을 만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