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박완서)
미적분 시험이 있던 날, 시험이 끝나자마자 자괴감과 좌절감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세 시간 동안 적분 기호에 충분히 얻어맞은 나는, 피곤할 때면 본능적으로 호두과자 굽는 냄새를 따라 걷던 중학교 2학년 때처럼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지금 내게 필요한 영양분이 있을 것 같았다. 그 거대한 호두과자 가게에 들어서자 각종 호두과자들이—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책들이—전시되어 있는 게 보였다. 한 학기 동안 이과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만 시달리고 정작 열심히 살지는 않은 스스로의 모습)에 질려 버린 나는 글씨를 더 이상 보기 싫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수론 책이나 뒤적거리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술술 읽히는 책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내가 당도한 곳은 박완서 작가의 책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빌리려던 내가 그저 같은 서가에 꽂혀 있다는—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책 표지가 세련되다는—이유로 빌린 책이다. 그날 이후로 3일 동안 ‘1일 1 박완서’를 실천하는 시발점이 된 책이기도 하다. 마흔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이 책은 원래는 다른 이름으로 나왔던 책의 개정판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설명하는 작가의 글이 흥미롭다.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최초이자 유일한 콩트집이 절판된 지 십여 년 만에 작가정신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어 했을 때 약간의 보완을 하고 제목을 ‘나의 아름다운 이웃’으로 바꾸면서 서문에서 콩트 쓰는 맛을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으로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비유한 바가 있습니다. (10쪽)
박완서 작가는 이 책을 ‘콩트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저면 콩트라는, 요즘은 짧은 코미디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단어가 단편소설이라는 단어보다 책 속의 이야기들에 알맞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간결하고, 위트 있으며, 통찰력이 빛나기 때문이다. 이야기 하나 하나가 짧고 경쾌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머릿속에 뭔가가 맴돌면서 자리를 차지한다. 아주 고민하게 만드는 건 아니지만서도, 생각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2021년의 끝에 서 있는 스무 살의 독자로서, 70년대에 쓰인 이야기들을 읽는 경험은 마치 근현대 생활사 박물관을 둘러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급격한 도시화의 등쌀에 서울로 올라왔지만 아파트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야기라든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시집을 가야 한다고 집안의 독촉을 받는 이야기라든가, 결혼을 하는 순간 사표를 쓰도록 압박을 받는 이야기라든가....... ‘옛날 이야기구나’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일한 주제들이 변주되면서 지금의 사람들 또한 괴롭히고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 세상에는 사람 사는 정이 없다는 말이나, 아홉 수를 넘기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소리나,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나, 우리가 지겹도록 듣는 것들이다. 어쩌면 박완서 작가가 창호지에 바늘구멍을 뚫고 바라본 그 세상은, 70년대의 세상이 아니라 지금의 세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