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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Cease to Understand the World (Benjamín Labatut)

모비 딕 2022. 4. 2. 03:43

 “When We Cease to Understand the World”는 과학을 소재로 한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는, 칠레의 소설가 벤하민 라바투트(Benjamín Labatut)의 소설집이다.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들이 섞여서 줄거리를 이룬다. 사실과 픽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 소설마다 다르지만,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할 정도로 똑똑하지만, 동시에 과학 때문에 자멸할 정도로 멍청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은 모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블랙홀의 심연을 발견한 슈바르츠실트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간 블랙홀 속 물체처럼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 파국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수학에서 ‘본질의 본질(the heart of the heart)’을 이해한 그로텐디크와 모치즈키는 이를 공개했을 때 맞이할 파국을 두려워한 나머지 숨어 사는 삶을 택한다. 생화학무기를 만들어내면서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하버마저도, 자신의 또 다른 발명품인 질소 비료 때문에 지구가 식물로 뒤덮이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 시달린다. 무서워서 덜덜 떠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생경하지만, 사실 두려움이란 과학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를 마주할 때, 우리는 경이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므로. 그렇게 저자 벤하민 라바투트는 과학에 대한 두려움이 낯설어 보여도 실은 당연함을 보여준다. 과학자들의 두려움이 당연하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이미 빠졌을지도 모르는 심연에 대한 슈바르츠실트의 두려움은 정의롭다. 하지만 식물로 뒤덮이는 식의 지구 멸망에 대한 하버의 두려움은……솔직히 웃긴다. 그의 화학무기가 저지른 일에 비하면, 그런 지구 멸망 시나리오는 너무 가소롭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두려움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은둔하는 삶을 택한 모치즈키와 극단적인 반전운동에 빠진 그로텐디크의 모습을 통해, ‘생산적인 두려움’이란 무엇일지 질문한다.

 

 소설 속에 과학적인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62쪽에서 저자는 “입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공간을 가로지를 수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단 한 경로만을 선택했다. 어떻게? 순전히 확률적으로(A particle could cross space in many ways, but from among them it chose only one. How? Through pure chance).”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이 설명을 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실제 주장은 이와는 달랐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제시한 코펜하겐 해석은, 관측되지 않은 입자의 경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입자의 경로가 확률적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원래 관측되지 않는다면 경로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 입자를 관측하지 않는 한, 경로는 선택되지 않는다. 심지어 저자는 이러한 점을 166쪽에서 지적한다. “‘가능성’에서 ‘실재’로의 전환은 오직 관측 또는 측정 중에 일어난다(The transition from the “possible” to the “real” only occurred during the act of observation or measurement).”라는 말로. 또한 54쪽에서도 저자는 사건의 지평선의 반지름이 결국 슈바르츠실트 반지름과 동일함을 간과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전자는 소설의 정합성 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후자는 확실히—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이 책은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가 아니라, 과학을 소재로 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로 ‘과학적’이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얼마 전, 과학연극 전문 극단 외계공작소의 강신철 기획을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과학연극은 아직 정의마저 모호한 분야다. “기획님은 과학연극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과학을 뺐을 때 연극성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 극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힘을 잃어버리는 공연이 과학연극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연극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학이 ‘극적 분위기 조성’을 위해 살짝 첨가되는 연극도 아니다.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으면서도,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중추에 과학이 놓인 연극이 바로 과학연극이다. 그렇다면 과학소설도 비슷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로서의 특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과학의 맥락 속에 견고히 자리잡은 소설. 그 정의에 따르면 “When We Cease to Understand the World”는 과학소설의 본질에 충실한 책이다. 소설 특유의 서사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과학의 양면적 힘에 대해 올바른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대중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부커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소설도 ‘좋은 소설’일 수 있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음을 증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