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2019. 2. 16. 12:08

국내 대학교에 진학해야 하는 나는 이제 등급을 챙기고 수능 준비를 해야 한다. 자이스토리가 분권되는 책이라는 사실을 저번 주에 처음 알았다(표지가 다 쓴 로켓 연료통처럼 떨어져나가서 0.3초 동안 패닉했다). 세상은 넓고 기출문제는 많다. 신기하게도 문제집들은 공부를 기피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문제를 마주한 나의 몸은 DNA 이중나선 구조보다도 더 뱅뱅 꼬였다.


왜 이렇게 문제풀이식 공부를 해야 할까. 뉴턴은 정석 세 바퀴 돌아서 미적분을 만든 게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수능 점수 잘 받아서 상대성 이론 논문 쓴 게 아니다. 마리 퀴리, 닐스 보어,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대치동 안 가고도 노벨상 잘 탔다. 찰스 다윈은 논술 전형 준비 안 하고도 목침 두께의 베스트셀러들을 줄줄 써냈다. 그런데 왜 한국 학생들은 이렇게 머릿속에 수많은 문제를 쑤셔넣어야 할까. 대학의 입학전형들이 요구하는 틀에 자신을 욱여넣으려 해야 하는 걸까.


공부를 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입시와 문제풀이는 생각할 능력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드는 생각에 집중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모든 틈과 자투리 시간은 머릿속에 시험 범위 내용을 하나라도 더 넣는 데 투입되어야 한다. 그래서 입시 교육이 끝나고 나면, 결과와는 상관없이 텅 빈 기계가 되어 버린다. 정신없던 시간이 모두 지나면 허무하고 허탈해진다. 아, 내가 3년 동안 뭘 한 거지? 하고 우울해진다.


'혹시 내가 잘못 산 것은 아닐까?'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았을 뿐인데 어떻게 잘못 살 수가 있지?'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처럼 생각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바깥의 공부를 하기로 했다. 기출문제 풀 시간을 줄여서 과학도서 읽고, 찰스 디킨즈 소설 분석하고, 다윈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 쓰고, 수영 연습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타협하지 않고 싶다. 성적표에 찍힐 숫자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목적을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고등학교 공부의 목적이 결국은 입시일지도 모른다. 자기 생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대학 입시에 성공하는 사람을 키우는 게 목표일 수도 있다(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주위 친구들이 서서히 변하는 모습을 보면 잘 모르겠다). 그래도 목에 학생증 걸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한다고 믿어야 한다. 과학철학자들이 과학은 진리가 아니라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 모음이라 말해도, 자기는 진리를 발견한다 믿는 리처드 도킨스처럼. 그렇게 정해진 길을 벗어나서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길로 돌아가다 보면, 결국 마음에 드는 어딘가에 닿을 것이다. 그게 대학교든 아니든.


"Cheshire-Puss,” she began, rather timidly, as she did not at all know whether it would like the name: however, it only grinned a little wider.
“Come, it’s pleased so far,” thought Alice, and she went on.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said the Cat.
“I don’t much care where—” said Alice. 
“Then it doesn’t matter which way you go,” said the Cat.
so long as I get somewhere,” Alice added as an explanation.
“Oh, you’re sure to do that,” said the Cat, “if only you walk long enough.”

Louis Carroll,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