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2019. 7. 10. 01:27

 수학은 나와 애증의 관계에 있다. 아니, 있었다. 한 학기 동안 이과용 수학을 수강하면서 나와 ‘증증’의 관계로 변한 수학은 나를 괴롭혔고, 힘들게 했고, 아프게 했다. 나는 스스로 주연과 연출이 되어 “사랑과 전쟁”이 아닌 “수학과 전쟁”을 찍었다. 도전문제와 심화문제에 치이면서 “세얼간이”의 “All Izz Well” 가사를 몸소 체험했다. “아, 답을 알았다! 근데…… 문제가 뭐였지?”

 

 수학이 잘 안 풀릴 때면 무작정 달리기를 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면 튜링이 천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장면 중간중간에 시골길을 전력질주하는 장면들이 끼워져 있다. 오오, 나도 달리기를 하면 수학이 좀 더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ε만큼은 가지고 운동장 트랙을 돌았다. 사실 달리기를 한 일차적인 이유는 도민체전이었지만(횡성군 만세!), 어쨌든 수학은 항상 잘 안 풀렸기 때문에 달릴 때는 수학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나는 왜 수학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을까. 역치를 넘기기 직전이라서 가장 힘든 걸까, 아니면 단순히 이게 내 길이 아닌 걸까. 보통 쓰는(그러나 내 기준에서는 오글거림의 역치를 넘긴) 표현으로 하면, 해 뜨기 직전이라 가장 추운 걸까. 아니면, 내가 볼츠만처럼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걸까.

 

 볼츠만은 모두가 원자론에 반대하던 19세기 독일 과학계에서, 외로이 원자론을 지지하던 천재 물리학자였다. 원자론을 굳게 믿는 볼츠만을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은 또다른 또래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니, 마흐는 철학을 좀 알았지만 볼츠만은 철학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마흐는 항상 철학적인 근거를 들어 볼츠만의 원자설을 공격했다. 과학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온도나 압력 같이 수치로 적을 수 있는 것만 믿어야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원자의 존재를 가정하냐, 과학이 무슨 소설이냐, 어쩌구저쩌구……. 참다 못한 볼츠만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런이 지글지글 불타오를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서, 빈 대학의 철학 교수가 되었다(와우!). 하지만 철학을 할 때, 볼츠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볼츠만의 정신은 철학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그[볼츠만]는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진한 사람처럼 행동함으로써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렇지만 그 밑바탕에는 도대체 이 철학자들이 무엇을 왜 주장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극도의 불만이 깔려 있었다.” (데이비드 린들리, "볼츠만의 원자", 이덕환 옮김, 승산, 260쪽)

 

나도 그랬다. 나도 한 문제당 풀이가 두 쪽 반이 넘는 문제 해답지를 읽으면서, 도대체 이 문제들이 무엇을 구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극도의 불만을 느꼈다. 왜 이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근본적인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풀이를 보기 전에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풀이를 읽고서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향한 질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수학으로 고통받는 것은 문턱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볼츠만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나를 욱여넣고 있기 때문일까. 예전에 수학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한 학기 동안 더더욱 괴로웠다. 수학을 많이 좋아했기에, 수학을 못하면 못할수록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인 것처럼 우울해졌다. 수학 잘 하는 사람들을 항상 동경했기에,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수학을 못하는 게 느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그런데, 결국 결단은 내렸고 수학은 해야 한다. 에라토스테네스 할아버지가 저승 문을 박차고 돌아온다 해도, 내가 수학공부를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내 손으로 제어판을 조종할 수 있는 영역은 노력밖에 없다. 그렇게 최대한 노력하고 나서, 얼마나 수학을 잘 하게 되는지는 내가 결정하는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그 노력마저도 100% 내가 좌우하는 게 아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날이 있으면, 한 문제 푸는 데 30분이 넘게 걸리는 날도 있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오후 11시 55분까지 면학실에 앉아서 정석과 아이컨택하는 것, 딱 거기까지다. 한 자습 동안 정석에게 몇 번이고 삼궤구고두를 올리더라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 그래서 볼츠만이 철학을 공부한 것보다 더 노력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는 것. 내 다음 학기 수학 공부의 유일한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