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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땜질에 좋은 활동/독서

백치(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by 모비 딕 2021. 9. 4.

 “백치”는 베개만 취급하는 러시아 작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이다(작가 이름도 본인이 쓴 소설처럼 길다). 한의원 목침만 한 두께 때문에 다 읽기도 전에 질려버렸고, 빌렸다가 그대로 반납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을 맞아 드디어 다 읽었다. 드디어!

 

 소설의 제목인 “백치”는 주인공인 미쉬낀 공작을 가리킨다. 미쉬낀 공작은 IQ가 낮은 진짜 바보가 아니다. 그가 백치라고 불리는 표면적인 이유는 성장기에 간질 질환을 앓으면서 사회생활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진짜 이유는 도덕성에 대한 너무나도 순수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악동뮤지션의 노래 “Re-bye”에 나오는 가사가 생각난다. ‘많이 나누는 사람이 바보라 불리는 시대를 보시게’.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한 사람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바보 취급을 당하는 법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쉬낀 공작은 또쯔끼라는 부호의 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여자, 나스따시야를 만난다. 이 길고 긴 소설은, 사실상 미쉬낀 공작이 나스따시야를 구원하려 하나 실패하는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고 소상하게 풀어쓴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명한 소설 “죄와 벌”처럼, “백치”도 줄거리만 파악한다면 수박 겉껍질만 씹어먹는 셈이다(핥는 셈이라고는 못 하겠다. 줄거리만 파악하려 해도, 그 수많은 활자를 다 판독하는 중노동이 필요하니까). “죄와 벌”에서 유명한 것은 전체적인 줄거리가 아니라 세심한 심리 묘사인 것처럼, “백치”에서도 집중해서 봐야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그로 인해 부여되는 사건의 필연성이다.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도 나는 나스따시야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나스따시야는 ‘약함이 악함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강요된 정부로서의 삶 때문에 나스따시야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그 상처가 ‘약함’의 시작이다. 그 상처의 깊이 때문에 나스따시야는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믿음을 잃고, 그 결백함을 입증해 줄 사람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함께 잃어버린다.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도록 세뇌당하는 것처럼.

 

공작, 이렇게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예요. 결혼해 봤자 머지않아 당신은 나를 깔볼 테고, 그렇게 되면 행복이고 뭐고 없게 돼요! 맹세하지 마세요, 나는 믿지 않을 테니까요! 결국은 부질없는 짓일 텐데요, 뭘! 차라리, 좋은 마음으로 헤어집시다. 안 그러면 나는 공상가니까 득이 될 게 없을 거예요! 사실 나도 당신을 머릿속에서 그려 봤어요. 당신이 맞아요. 내가 저 사람의 시골집에서 5년 동안 홀로 외롭게 살고 있을 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당신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지요. 정직하고 착하고 다소 어리석은 듯한 사람이 문득 나타나더니 <나스따시야, 당신은 죄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러한 공상을 하다가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어요……. 그러고 있으면 바로 저 사람[또쯔끼]이 찾아와서 1년에 두 달쯤 머물며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화나게 하고, 구역질나게 하고, 추잡하게 하곤 떠나 버리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천 번이나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했는데, 삶에 무슨 미련이 있는지 죽어 버리질 못했어요. 자…… 로고진,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나요? (268-269쪽)

 

그런 나스따시야는 공작을 만나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심지어 자신에게까지도) 입증해 줄 사람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공작을 통해 죄책감에서 헤어나오고 싶다는 소망과 동시에, 공작의 삶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느낀다. 두 가지 감정의 충돌 속에서 나스따시야의 상처는 점점 미쉬낀 공작을 좌지우지하려는 악함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나스따시야는 천천히 가라앉고 만다. 죽음이라는 바닥에 닿을 때까지. 그리고 나스따시야를 끌어올리려 노력했던 미쉬낀 공작도 악함의 촉수에 휘말려 함께 가라앉는다. 나스따시야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러한 결말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더더욱 괴롭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나는 정말 궁금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암이 한 단계씩 발전하는 것처럼, 약함도 악함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스따시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악함이 자라나는 과정을 포착한 CT 사진 같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 악함으로의 발전을 아무런 정죄 없이 그려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책장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그저 공감과 안타까움뿐이다. 글 어디에도 섣부른 판단은 없다. 그는 어떻게 정확함과 따뜻함의 균형을 맞춘 걸까. 사람과 사회를 꿰뚫어보면서도, 그 모습을 정죄하지 않는 겸손은 어떻게 체득한 걸까.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을 다 읽으면 나도 그런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소설 써 보겠다고 설치기 전에 그의 저작부터 다 읽어야 할 것 같다. 음, 읽기만 하다 죽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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