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원래 영어 제목은 “Dry Store Room No.1: The Secret Life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건조품 보관실 제1호: 자연사 박물관의 비밀스러운 삶)”이다. 여기서 건조품 보관실 제1호가 뭔지는 저자인 리처드 포티가 책의 도입부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건조품 보관실 제1호는 일종의 잡동사니 보관실이며, 이 기관[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망각된 기억이 보관된 장소였다. (...중략...) 분명히 그곳은 아주 없어지기 전까지는 어지럽혀질 가능성이 전혀 희박한 곳이었다. (49쪽)
그러니까 건조품 보관실 제1호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방들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고, 그렇다고 또 버리기는 뭐한 물건들을 처넣은 뒤 잊어버리기 위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어딘가 기괴하다는 이유로 전시에서 제외된 포르말린 병 속 표본들,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열등한' 순서대로 나열한 두개골 모형 등등이 모두 이 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포티는 이어서 말한다.
나는 그 보관실이야말로 내 머릿속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즉 기억의 뒤죽박죽된 창고에 대한 물리적 유비(類比)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기 있는 물건 모두가 훌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억압된 기억과 마찬가지로, 비록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컬렉션들은 결코 완전히 내버려진 적이 없었다. 나는 이 책에서 내 기억 속의 몇 가지 진열장을 열고, 몇 개의 서랍을 뒤적여볼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일종의 컬렉션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일들의, 그리고 당혹스러웠던 순간들의 컬렉션을 말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의 큐레이터인 셈이다. (49쪽)
나는 “런던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책을, 저자 본인의 이 말보다 더 잘 요약할 자신이 없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고생물학 담당 선임 연구원이었던 저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그만의 건조품 보관실 제1호를 글로 풀어낸다면 바로 이 책이 될 것이다. 저자는 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동료 과학자들과, 그들이 수행하던 별의별 연구들을 이 책에서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릿속 건조품 보관실 제1호’라는 호칭이 이 책에 대한 순수한 칭찬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존재하는 진짜 건조품 보관실 제1호처럼, 이 책의 내용은 뒤죽박죽이다. 과학자에 얽힌 일화와 그 주변인에 대한 뒷이야기, 과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설명이 완전히 뒤섞인 채로 나온다. 그렇기에 과학적인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겠다는 포부는, 이 책을 읽을 때만은 버리는 것이 좋다. 게다가 진짜 건조품 보관실 제1호에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시대적인 전시물이 처박혀 있는 것처럼, 이 책의 책장에서도 구시대적인 발상들이 고개를 디민다. 박물관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성추행을 사소한 일로 치부한다든가,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박물관을 세운 것을 칭찬한다든가(특히 이 부분은 일제 치하에 만들어진 철도와 전기 시설을 근거로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는 사고와 닿아 있다고 느낀다) 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런 정돈되지 않은 서술 방식이 어딘가 익숙했는데, 기억을 더듬다가 읽으면서 똑같은 기분을 느꼈던 책을 발견했다. 내게는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이 책처럼 어지렵게 다가왔다. 대중에게 과학 및 과학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쓴 책은 이렇게 정신없을 수밖에 없는 건가. 아니면 나 혼자서만 정돈이 안 되지 않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처럼 읽고 나서 어지럽다고 느낀 사람은 없는 건가. 두 책 모두 출판 이후 평단의 칭찬을 엄청나게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 질문의 답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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