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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땜질에 좋은 활동/독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

by 모비 딕 2021. 12. 17.

 방학 때였던 것 같다. 교보문고를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언젠가는 읽어야지하면서 표지를 찍어 두는 짓을 자주 했다. 그러고 나서 그 사진을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언젠가는 그 책을 읽게 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도 그때 점찍어둔 책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유명한 작가의 그렇게 유명한 대표작을, 왜 이제서야 읽게 됐을까. “나목을 재미있게 읽은 데다가,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이 책이 꽂힌 서가를 자주 지나다녔음에도 지금까지 이 책을 펼치지 않은 것은 아마 너무 옛날에 출간된 그 책들의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표지를 보고 책을 고르는 버릇을 고치기 전에, 예쁜 표지를 한 개정본이 출간되었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게 되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박완서 작가의 유년 시절을 담은, ‘소설 아닌 소설이다.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지어낸 이야기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어떻게 쓰인 건지를 모르고 다짜고짜 읽어내려가다 여러 번 놀랐다. 책 속의 그림이 너무나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걸 다 상상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진실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도 너무 놀란 나머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 상상으로 가능하다고? 그러다가 주인공의 할머니가 주인공을 완서라고 부르는 어느 한 장면에서 의문이 빵 터져 버렸다. 이건 순도 100% 박완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어안이 벙벙하지 않도록, 박완서 작가는 책 맨 앞에 덧붙인 작가의 말에서 친절하게 설명해 두었다. (작가의 말을 무시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지 않고 넘기는 습관을 버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 보았다.
쓰다 보니까 소설이나 수필 속에서 한두 번씩 우려먹지 않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때그때의 쓰임새에 따라 소설적인 윤색을 거치지 않은 경험 또한 없었으므로, 이번에는 있는 재료만 가지고 거기 맞춰 집을 짓듯이 기억을 꾸미거나 다듬는 짓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를 해 보았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집의 규모와 균형을 위해선 기억의 더미로부터 취사선택이 불가피했고, 지워진 기억과 기억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 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으로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7-8)

 

 위에서 말했듯 이 사정을 몰랐던 내가 책을 읽다 의아해할 정도로, 박완서 작가의 글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많은 식구들과 함께 시골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서울로 올라와서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때와, 중 ·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진학하던 그 시간들이 꼭 어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아니,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는 그것보다도 더 생생하다. 그때 보고 들은, 엄마의 잔소리에서부터 미루나무에 부서지던 햇살까지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엄마는 우리가 가난하니까 사는 건 문밖에서 살아도 할 수 없지만 학교는 문안에 있는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그건 이미 엄마가 그렇게 다 정해 놓은 일이었다. 내 의견 같은 건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때는 국민학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시험을 쳐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중략…)  문제를 세 개 내줬는데 나는 그중에서 두 개밖에 못 맞혔다. 바람이 연기가 나부끼는 반대 방향으로 분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엄마는 주소를 안 물어봤단 소리에 일단 안심을 하고 나서, 그래도 틀린 문제가 나오자 실망이 여간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고 단정을 했으면 그만이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두루마기 자락, 운동장 깃대 맨 꼭대기에 꽂힌 일본 국기 등을 맹렬하게 손가락질하면서
시방 바람이 어디로 부냐? , 어디로 불어? 시상에, 그것도 모르다니 떨어져 싸다 싸.”
이러면서 분해했다. 운동장이 엄청나게 넓고 주위에 인가가 없었던 매동학교 운동장엔 그날따라 왜 그렇게 바람이 세찼던지
. (59-63)

 

그날 이후 공일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씩 읽는 건 내 어린 날의 찬란한 빛이 되었고, 복순이와 나는 더욱 단짝이 되었다. (…중략…)
내 꿈의 세계[도서관 어린이 열람실] 창밖엔 미루나무들이 어린이 열람실의 단층 건물보다 훨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
銀貨)
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 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158)

 

 내게 기억의 깊이를 여실히 느끼게 한 것은 이미지도, 말도 아닌 그 둘의 조합인 듯하다. 만약 이 책이 엄마의 잔소리만을 담고 있었다면, 혹은 미루나무의 햇살만을 담고 있었다면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박완서 작가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오래 곱씹어 본 뒤 글로 풀어낸다. 그렇기에 삶에서 길어낸 이미지의 조각들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들은 이야기들에 대해 작가가 지닌 애정이 책장에서 묻어난다. 곱씹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순수한 애정이든, 애증이든. 그 사랑에 이끌려 나는 나를 잊어버리고 이야기 속에 온전히 녹아들었다. 뿐만 아니라 진지한 삶 이야기를 하다가도 간간이 끼어드는 농담은, 한없이 비장하고 슬픈 이야기에서도 웃을 구석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한국인의 DNA라는 성석제의 말이 생각나게 한다.

 

 독후감이랍시고 쓰는 글에 인용만 한가득 해대자니 면목이 없다. 하지만 책 속의 말이 내 글보다 월등히 좋아서,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로 자판을 두드리다가도 자연스럽게 인용하고 싶어지는 걸 어쩌겠는가. 하지만 진짜로 마음을 울리는 글은 책의 맨 마지막에 나왔기 때문에, 다시 인용을 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 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중략…)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 (311-312)

 

이 말은 증언함으로써, 그리고 글을 씀으로써 의무를 다하고 벌레를 벗어날 거라는 강한 희망을 내게 준다. 처음 읽었을 때도 그렇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는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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