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n Trial”은 재판의 역사에 대한 책이 아니라 역사 재판에 대한 이야기다.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학자인 저자,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E. Lipstadt) 교수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역사에 대한 책을 펴낸다. 그런데 그 책에서 신랄하게 깠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이 저자를 고소한다. 명예훼손죄로. 원고가 피고의 혐의를 증명해야 하는 미국과는 달리, 영국의 재판 시스템에서는 피고가 본인의 무고함을 증명해야 한다. 어빙은 영국인이기에, 립스타트 교수는 어빙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이 모두 사실임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재판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재판은 자동으로 어빙의 승소로 끝난다. 평소 ‘홀로코스트 부정론은 억누르면 더 극성이 된다. 저절로 사라지게 내버려둬야 한다’는 의견을 펼치던 저자는, 그렇게 울며 겨자먹기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와의 재판에 임하게 된다.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에게 “수감 번호 타투로 지금까지 얼마나 버셨소?” 따위의 질문이나 해대는 어빙의 전적을 감안해, 립스타트 교수와 그 변호인단은 재판의 증인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부르지 않기로 한다. 증인 심문에서 어빙이 생존자에게 무슨 상처를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립스타트 교수 팀은 홀로코스트 연구 전문가들로 증인단을 구성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축 역사학 전문가인 로버트 얀 반 펠트(Robert Jan van Pelt) 교수, 독일 근대사 전문가인 리처드 에반스(Richard Evans) 교수, ‘최종 해결(Final Solution: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전멸 계획)’ 전문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 교수, 독일인이자 극단주의적 정치관을 연구하는 정치학자 하조 푼케(Hajo Funke) 교수, 마찬가지로 독일인이자 나치 체제의 전문가인 피터 롱거리치(Peter Longerich) 교수 등이 어빙의 주장은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증인단에 선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천장에서 가스를 투하하기 위한 구멍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건물은 가스실이 아니라 공습 피난처이다’, ‘히틀러는 최종 해결을 지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와 같은 어빙의 주장을, 이 전문가들은 역사 연구 결과로 격파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이 학자들 및 변호팀에 대한 립스타트 교수의 자세한 묘사가 나오는데, 하나같이 매력적인 사람들이다(특히 재판 중에 만화를 그리는 취미가 있는 램프턴 변호사는 더더욱). 진실을 위해 싸운다는 표현은 좀 진부할지 모르지만, 이 사람들의 증언을 읽다 보면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특히 수정의 밤(kristallnacht: 1938년 11월 9일-10일 밤 동안 SS를 비롯한 나치 치하 독일인들이 유대인 상점과 시나고그를 파괴한 사건)에 대해 증언하면서 브라우닝 교수가 눈물을 글썽이고, 강제수용소의 목적은 분명 수감자들을 살해하는 것이었음을 못박으면서 롱거리치 교수가 (어빙의 괴변에 대한) 분노로 얼굴을 붉히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재판은 립스타트 교수 측의 압승으로 끝나는데, 이를 통해서 이성으로 개소리를 누르는 게 가능함을 증명했다(이건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개소리는 이성으로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도 책에서 지적하듯이, 이 재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부정론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한 재판’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생존자가 모두 사망한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홀로코스트를 부정할 수 없게 기록하고 있기에 그렇다. 이 점은 위안부 역사 문제와 연결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모두 돌아가신다고 해도, 위안부 징집이 없는 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위안부 징집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체계적인 연구 진행이 필수적일 것이다. 방대한 홀로코스트 관련 연구 결과가 축적되었고, 지금도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듯이.
원래 이 책은 1학년 때 통합사회 시간에 황소희 선생님이 소개하신 책이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수업 중에 “만약 괴변을 펼치는 사람이 그 주장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영화라고 언급하셨다(그렇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제목은 <나는 부정한다(Denial)>). 책을 읽는 내내 수업시간에 들었던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책이 끝나갈 때쯤 판사는 립스타트 교수 측에게 묻는다. “만약 누군가가 반유대주의자이고 (…중략…) 극단론자라면, 그가, 말하자면, 진실된 반유대주의자이고 진실된 극단론자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것이 진정으로 그의 의견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If somebody is antisemitic . . . and extremist, [is] he perfectly capable of being, as it were, honestly antisemitic and honestly extremist in the sense that he is holding those views and expressing those views because they are, indeed, his views?).” (259쪽) 립스타트 교수 측은 당황한다. 지금 판사가, 어빙이 진짜 자신의 주장을 믿는다면 그 주장은 용납 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가? 그러나 판사가 판결문을 읽으면서, 이 걱정은 기우로 드러난다. 어빙이 “역사적 증거를 비틀고 조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건들을 그의 이데올로기적 신념과 일관된 방식으로 표현하길 원했다(desire[d] to present events in a manner consistent with his own ideological beliefs even if that involved distortion and manipulation of historical evidence)” (275쪽)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을 비튼다면 용납할 수 없다는, 지극히 간명한 판결이다.
책을 끝내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재판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이게 마지막 싸움은 아닐 것이라고. 반유대주의는, 아니 모든 편견은, 이성으로는 뚫을 수 없기 때문이다. 편견은 반증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세대는 그것들과 맞써 싸워야 한다(in every generation they [prejudices] must be fought)” (296쪽). 이 말을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용기있게 삶으로 증명해낸 저자에게 박수를.
책을 읽다 눈이 번쩍 뜨이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길고 긴 재판 중간에 지쳐서 영화를 보러 간다.
"The weekend promised an escape from the trial. In a Leicester Square theater every weekend there was a sing-along screening of the Rodgers and Hammerstein classic The Sound of Music. People came dressed as their favorite character or object. There were brides, Austrian peasants, yodelers, nuns, and brown paper packages tied up with string. My favorite was a man covered in bright yellow lycra: "Ray, a drop of golden sun." The lyrics appeared on the screen so the audience could sing along. When a particular character appeared in the movie, everyone dressed in that role would rise, face the audience, and recite the character's lines. All this was enough to take my mind completely off the trial." (220쪽)
싱어롱 버전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니... 갈색 소포랑 햇빛으로 코스프레한 관객이라니... 이게 1990년대 영국 감성인가...? 너무 귀여운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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