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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땜질에 좋은 활동/독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박완서)

by 모비 딕 2022. 1. 28.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잇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처럼, 이 책도 자서전과 소설의 경계에 있다. 그러니까 온전히 기억에만 의지해서, 상상력은 기억이 텅 빈 구멍을 메꿀 때만 사용해서 쓴 소설 아닌 소설인 것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박완서 작가의 학창 시절이 나와 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앞 이야기가 끝난 시점, 즉 박완서 작가가 성인이 되고 6·25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가 싱아를 다 먹었는지 질문하는 박완서는 어린이지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는지 자문하는 박완서는 성인인 것이다. 두 질문 다 바뀐 세상에 대한 의아함과 약간의 분노를 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어렸을 적의 기억들은 찬란한 것과 그늘진 것이 섞여 있다면, 성년의 나날들은 그림자진 것들이 주다. 그렇기에 두 번째 질문을 하는 박완서 작가의 목소리는 좀 더 어둡다. 그리고 더욱 단단하다. 그 목소리에는 고통의 기억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힘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것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마찬가지로 기억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이 점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더욱 놀랍게 다가왔다. 좋은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지만, 아픈 기억을 그렇게 묘사하다 보면 고통이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고, 그 기억을 자세하게 돌이키면서 글로 풀어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피난 이후로 텅 빈 집들을 올케와 함께 털어 가족들을 먹여살린 일, 오빠가 인민군으로 징용되었다가 도망쳐온 뒤로 여덟 달 동안 서서히 죽어간 일, 미친 오빠와 그 광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족들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 일, 그리고 전쟁 막판에 PX에서 일하면서 박수근 화백을 만난 일(이 만남은 나중에 박완서 작가가 등단작 나목을 쓰는 계기가 된다) 등등. 박완서 작가는 단순히 힘들었다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렇다고 왜 힘들었는지를 직설적으로 말하지도 않고, 그저 순간들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힘듦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한다.

 

 고통은 괴롭다. 하지만 고통받은 사람들은 괴로운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가는 힘을 얻기도 한다. 그 힘이 만들어내는 것이 문학인지, 예술인지, 감동인지 나는 모른다.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싶지도 않다. 꼭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분명 고통은 고통에서 끝나버리지 않는다. 상처의 치유는 더 큰 희망으로 이어진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그 점을 실감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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